
정보라 작가의 단편 소설집 저주토끼는 한국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2022년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이 책은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으며 한국 장르문학의 가능성을 넓혔다. 총 10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저주토끼는 SF, 호러,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적 요소를 통해 인간의 내면, 사회 구조, 권력의 작동 방식을 날카롭게 해부한다. 특히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해석 가능한 이야기들이 많아, 문학성과 사회적 메시지를 동시에 품은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기존 문학이 다루지 못한 영역을 용기 있게 탐색한 이 작품은, 한국 문학이 장르적 실험과 사회 비판을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정보라 작가의 작가적 배경부터, 저주토끼의 구성과 대표 단편들의 줄거리, 장르적 접근 방식에 이르기까지 입체적으로 살펴본다.
정보라 작가 소개
정보라 작가는 1979년생으로, 작가이자 번역가로 활동하며 SF, 호러,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 소설을 집필해 온 독립적 여성 작가이다. 연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다수의 해외 SF 소설을 한국어로 번역하며 문학과 장르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2000년대 초부터 단편집과 중편, 장편소설을 꾸준히 발표해 왔으며, 문단 중심의 전통 문학이 아닌 장르 문학을 중심으로 한 활동을 통해 기존 문학계와 차별화된 행보를 보였다. 특히 그녀는 한국 사회 내 여성의 위치, 가부장제의 억압, 폭력과 생존의 문제를 장르적 장치를 활용해 깊이 있게 풀어내며, ‘페미니즘 SF 작가’라는 별칭도 얻었다. 정보라의 문체는 간결하면서도 이미지가 강렬하며, 전통적인 문학이 담아내기 어려운 서사들을 기괴함과 아름다움 사이에서 효과적으로 형상화한다. 저주토끼는 그녀가 오랜 시간 쌓아온 작가적 세계관이 농축된 결과물로, 단편 하나하나가 독립적이면서도 공통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평가받은 작가라는 점에서도, 그녀의 문학적 실험과 성취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또한 정보라 작가는 국내 장르문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한국 문학이 세계로 확장될 수 있음을 실질적으로 증명해 낸 인물로 기록된다. 그녀는 단순히 외연을 넓힌 것이 아니라, 문학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작가로 높이 평가된다.
단편집 구성과 대표 줄거리
저주토끼는 총 10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기 다른 설정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인간의 폭력성, 사회의 억압 구조, 생명과 기억의 의미를 중심에 둔다. 책의 표제작인 저주토끼는 가업으로 저주 인형을 만들어 파는 한 남자가, 선친의 억울한 죽음과 가문의 몰락을 복수하기 위해 인형에 저주를 담아 기업 총수를 파괴하는 이야기다. 복수와 저주의 서사는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서, 자본 권력의 부패와 그에 맞서는 개인의 분노를 극적으로 형상화한다. 이 이야기는 “저주는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설정을 통해 분노와 고통의 전이 방식을 서늘하게 드러낸다. 또 다른 주요 단편인 그것이 돌아왔다는 감정을 통제하는 기술이 일상화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뇌에 장치를 이식해 감정을 제거한 사회에서, 주인공은 과거의 끔찍한 기억이 돌연 부활하며 정신적으로 무너져간다. 이 작품은 기억의 삭제가 정말 해방일 수 있는지, 혹은 감정 없는 인간은 과연 인간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윤리적 딜레마를 부각시킨다. 돼지신은 전통신앙을 모티브로,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과 복수의 서사를 다룬다. 가난하고 권력 없는 여성에게만 내려지는 ‘돼지신’의 신탁과, 그것이 빚어낸 사회적 낙인의 문제는 기이하면서도 현실의 구조적 불평등을 떠올리게 한다. 이외에도 뿌리 이야기, 머리, 슬픈 생물 등은 각각 가족, 기술, 생명의 윤리에 대해 깊은 사유를 유도하는 서사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이야기에서 현실은 조금씩 뒤틀려 있으며, 독자는 이 왜곡된 현실 속에서 오히려 실제 세계의 문제를 더 명확히 인식하게 된다.
장르문학으로서의 SF적 접근
저주토끼의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정보라 작가가 장르문학의 형식을 통해 기존 문학이 다루지 못한 현실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린다는 데 있다. 특히 SF적 상상력은 그녀의 작품에서 인간의 정체성과 사회 구조를 탐색하는 중요한 도구로 작용한다. 뿌리 이야기에서는 인간의 기억을 식물에 이식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미래를 그린다. 이 세계에서는 기억과 생명, 정체성의 경계가 흐려지고, 기억이 곧 생명의 조건이 되는 새로운 존재론이 펼쳐진다. 이러한 상상은 생명공학과 인공지능의 발전 속에서 인류가 마주하게 될 철학적 질문을 선취한다. 물고기 인간은 환경 파괴로 인해 인간이 돌연변이를 겪고, 바다 생물과 융합된 새로운 존재로 진화하는 이야기를 통해 생태학적 SF의 경지를 보여준다. 인간 중심의 문명이 만들어낸 파괴가 역으로 인간을 변형시키는 설정은 생태 위기 시대의 경고이자,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재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SF적 접근은 단순히 과학적 미래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인간의 관계, 시스템과 감정, 권력과 통제라는 현대사회의 근본 문제를 문학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이다. 정보라 작가는 이를 통해 문학의 경계를 넓히고,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서 새로운 서사를 창조한다. 독자들은 장르 문학 특유의 몰입감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과 사회적 모순을 동시에 사유할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저주토끼는 단편소설집이라는 형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오히려 그 특성을 활용해 더 날카롭고 밀도 높은 서사를 전달하는 작품이다. 각 단편은 완결된 세계를 품고 있으며, 현실의 부조리를 환상적으로 변형해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정보라 작가는 SF와 호러, 판타지라는 장르적 틀 안에서 젠더, 권력, 기억, 생명 같은 철학적 주제를 끊임없이 탐색하며, 기존 문학이 놓치고 있던 목소리들을 작품 속에 소환한다. 한국 장르문학의 가능성을 세계에 알린 이 작품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장기적인 문학적 흐름의 전환점을 보여주는 이정표라 할 수 있다. 단편이라는 짧은 형식을 통해 오히려 더 큰 서사를 담아낸 저주토끼는, 현대 문학에서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답이 될 것이다. 문학성과 장르적 재미를 모두 찾고 있는 독자라면, 지금 바로 이 책을 읽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