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판타지 문학의 상징적 존재, 이영도 작가가 7년 만의 신작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으로 돌아왔다. 드래곤 라자, 눈물을 마시는 새 등으로 장르문학의 지형을 바꿔놓은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단순한 판타지를 넘어, 추리와 메타픽션, 극 문학 요소까지 아우르는 전례 없는 장르적 융합을 시도했다. 이 작품은 작가 개인의 문학적 야심이 담긴 결과물이며, 동시에 독자들에게 문학의 경계와 창작의 윤리를 질문하는 깊이 있는 소설이다. 복잡한 서사 구조와 풍부한 상징, 실험적 서술이 어우러진 이 소설은, 단순한 장르 문학의 틀을 넘어 하나의 문학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영도 작가의 복귀, 7년 만의 신작 등장
이영도는 ‘한국 판타지 문학’이라는 말을 대중적으로 정착시킨 작가 중 한 명이다. 그의 데뷔작 드래곤 라자는 1998년 당시 인터넷 연재라는 독특한 형식과 깊이 있는 서사로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후 발표한 피를 마시는 새, 눈물을 마시는 새 등은 ‘이영도 월드’라는 고유의 세계관을 완성하며, 독자들에게 철학적 깊이와 감동을 동시에 전달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단순히 잘 쓰는 작가가 아니라, '무엇을 쓰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 온 창작자였다.
그로부터 7년, 오랜 공백 이후 발표된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은 이영도의 문학적 진화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기존의 세계관 중심의 서사에서 벗어나, 이번에는 한 명의 소설가가 자신의 죽음을 소재로 집필하는 ‘작중작’ 형식의 장편소설을 통해, 소설이라는 장르의 본질 자체를 탐구한다. 주인공 어스탐 로우는 죽은 것으로 알려진 작가로, 그는 기이한 방식으로 살아남아 ‘자신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소설로 기록한다. 이 설정은 단순히 흥미로운 서사의 장치를 넘어, 창작자와 작품, 그리고 독자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히, 작중 삽입된 ‘희곡’ 형식의 짧은 글은 이 작품이 문학적 실험의 장이라는 점을 강하게 시사한다. 각 장의 말미에 삽입되는 이 희곡은 서사의 보조수단을 넘어서, 독자에게 전혀 새로운 시점을 제시하거나, 서사 자체를 재해석하게 만드는 장치로 활용된다. 이영도 작가는 ‘판타지’라는 장르를 끌어안되, 그 속에서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은 그런 점에서, 그의 가장 야심찬 프로젝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판타지와 추리, 그 사이의 정교한 균형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의 독창성은 장르의 융합에서 빛을 발한다. 밀실 살인, 추리, 메타픽션, 판타지라는 상이한 장르들이 하나의 유기적인 서사 속에서 충돌하지 않고 정교하게 얽혀 있다. 특히, 밀실 추리라는 고전적인 형식 위에 판타지 세계관을 얹는 방식은 흔치 않다. 마법적 요소와 상상력 넘치는 존재들이 살인사건 해결이라는 논리적 전개와 맞물리며, 장르 간 불협화음 없이 긴장과 몰입감을 유지한다.
밀실 추리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제한된 공간’과 ‘폐쇄된 인물 구성’이다. 이영도는 이 기본 구조를 따르면서도, '판타지적 공간'이라는 설정을 통해 공간 자체의 성격을 다르게 만든다. 예를 들어, 살아있는 듯 움직이는 건물, 과거를 기록하는 의식체계, 독특한 직업군과 종족들이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세계관이 넓어지는데, 이러한 설정이 사건의 복잡성을 더하면서도 결국은 치밀하게 맞물리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작중 어스탐 로우는 단순한 탐정이 아닌, '자신의 죽음 이후를 추적하는 작가'라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그는 추리와 집필을 동시에 수행하며, 사실상 독자와 같이 사건을 탐색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가 마주하는 것은 단순한 범인이 아니라, 창작자 본인에 대한 의심과 고찰이다. 이중 구조의 서사는 독자가 단순히 '범인이 누구인가'를 추적하는 것을 넘어, ‘이야기란 무엇인가’, ‘진실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는가’ 같은 철학적 질문으로 독서를 확장시킨다.
또한, 작품의 스타일도 고전적인 추리소설의 전개 방식을 일정 부분 차용하고 있다. 각 인물의 진술, 모순된 단서, 시간대 조작 등은 에도가와 란포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을 연상케 하지만, 이영도는 이러한 장르적 클리셰를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세계관과 문체로 재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그가 보여주는 ‘유머’는 독자의 긴장을 이완시키는 동시에, 이야기의 톤을 절묘하게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메타픽션과 창작 윤리, 문학 그 자체를 묻다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의 진정한 핵심은,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던지는 메타적인 질문에 있다. 이 소설은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뛰어넘어, 창작자와 창작물, 독자의 관계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만든다. 어스탐 로우라는 인물은 단순히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닌, ‘작가 자신의 분신’으로 기능하며, 작품 내내 자신의 창작 행위에 대한 반성과 질문을 이어간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작품 속 ‘소설 속 소설’인 임사전언이라는 텍스트가 독립된 인격을 가진 듯한 위상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실제 작중 등장인물들도 읽으며, 그 안에서 또 다른 현실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구성은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고 해석하는 하나의 방식임을 시사한다. 이영도는 이중서사, 삼중서사의 구조를 통해 독자가 ‘이야기’의 본질을 의심하게 만들며, 독서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자각을 유도한다.
창작 윤리 또한 작품에서 중요한 테마로 다뤄진다. 어스탐 로우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누군가를 밝혀내기 위해, 주변 인물들의 삶을 자신의 소설 속에 재현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타인의 비밀과 상처를 드러내며, 독자로 하여금 ‘작가는 어디까지 써야 하는가’, ‘작품을 위해 타인의 삶을 침범해도 되는가’ 같은 불편한 질문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는 현실 세계에서의 표현의 자유와 검열, 창작자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메타포로도 읽힌다.
또한, 작품 후반부에서는 ‘이야기를 쓴다는 행위’ 자체가 가지는 위험성과 책임이 더욱 강조된다. 어스탐은 단순히 진실을 밝히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왜 그런 글을 쓰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이는 이영도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단지 이야기를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 도덕, 시대와 마주하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독자 또한 이런 창작자의 고민을 통해, 문학의 역할과 가치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은 단순한 장르 소설이 아닌, 장르의 경계를 해체하고 문학의 본질을 탐구하는 대작이다. 이영도는 이번 작품을 통해 판타지와 추리, 희곡과 메타픽션, 철학적 사유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서사로 자신만의 세계를 또 한 번 확장시켰다. ‘이야기란 무엇인가’, ‘창작자는 누구인가’에 대해 묻는 이 작품은, 단순한 독서의 즐거움을 넘어 독자 스스로의 존재와 상상력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영도라는 이름이 왜 여전히 유효한지, 그리고 왜 그가 한국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인지 확인하고 싶은 독자라면, 지금 바로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을 펼쳐보자. 이 한 권의 책이 당신의 독서 세계를 완전히 뒤흔들 수 있다.